
유유히 흐르는 밀양강 물줄기가 기암절벽을 감싸 도는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로 들머리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한옥 기와지붕 위로 찬란한 노란빛을 뿜어내는 ‘금시당(今是堂)·백곡재(栢谷齋)’가 나들이객을 맞이합니다.
전국 각지의 유명 단풍 명소들이 요란한 인파와 상업 시설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과 달리, 이곳은 굽이치는 강물과 나지막한 돌담, 그리고 조선 사대부의 기품이 서린 고택이 어우러져 화려함보다는 묵직한 고즈넉함으로 가을의 깊이를 전하는 공간입니다.
11월 초순을 지나 중순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고택 마당을 온통 샛노란 융단으로 뒤덮는 수령 약 490년 은행나무 고목은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차분하게 늦가을을 음미하려는 이들에게 더없이 맑은 쉼표를 건네고 있습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 "지금이 옳음을 깨닫다"

금시당이라는 단아한 현판 뒤에는 혼란했던 조선 중기 사화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참된 삶의 가치를 좇았던 한 선비의 결단과 철학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조선 제13대 임금 명종 때 좌부승지에 올랐던 선비 이광진 선생은 훈구와 사림의 극심한 정쟁에 회의를 느끼고 벼슬을 내려놓은 뒤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하여 이 정사를 지었습니다.
사찰이나 정자의 이름은 도연명의 대표 명문인 귀거래사 제5장의 ‘각금시이작비, 지금의 삶이 옳고 지난날 벼슬길에 섰던 것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라는 글귀에서 두 글자를 취해 지어졌습니다.
490년을 이어온 거대 보호수와 백곡재의 유래

이광진 선생이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앞마당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는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보호수로 자라났습니다. 고택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의 7대손이자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백곡 이지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곡재’가 나란히 이어져 문중의 유서 깊은 내력을 묵묵히 증언합니다.
한 가문의 역사를 넘어 5세기에 걸쳐 자라난 나무와 고택은, 가을마다 황금빛 잎사귀를 떨구어내며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한국 전통 미학의 정수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품은 150m 은행나무길과 오전 방문의 비밀

금시당 마당에 들어서기 전, 맑은 밀양강을 따라 호젓하게 뻗은 약 150m 남짓의 흙길 산책로에서부터 늦가을의 그윽한 정취가 발끝을 간질입니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둑길을 걸어 고택 안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완전히 가려버린 490년 은행나무 거목이 노란빛 캐노피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쏟아져 내리는 은행잎들은 오래된 흙담과 전통 한옥의 툇마루, 장독대 위에 소복하게 쌓여 마치 한 폭의 고운 한국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서향을 바라보고 앉은 고택의 지형적 특성상 오후에 찾으면 강한 역광으로 인해 사진에 짙은 그늘이 지므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담장과 노란 잎사귀를 화사하게 비추는 오전 10시~11시 사이에 방문해야 가장 맑고 은은한 본연의 황금빛을 카메라와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밀양 금시당·백곡재는 490년 거목이 빚어낸 황금 융단과 조선 선비의 귀거래사 철학, 밀양강변의 고즈넉한 정취를 무료입장으로 누리는 영남 최고의 늦가을 힐링 성지입니다.
실전 가을 힐링 추천 탐방 동선
- 금시당 은행나무 완주 코스 (총 체류 약 1시간): 국궁장 무료 주차장 도착 ➔ 밀양강변 150m 흙길 산책로 진입 ➔ 금시당 외삼문 통과 ➔ 490년 은행나무 보호수 관람 (오전 순광 사진 촬영) ➔ 금시당 툇마루 감상 ➔ 백곡재 고택 담장길 산책 ➔ 주차장 원점회귀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 월연정과 영남루, 그리고 위양지
금시당 관람을 마친 뒤 차량으로 5분 거리인 밀양 8경의 명소 '월연정'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세요. 달빛이 물에 비치는 풍경이 일품인 조선 정자로, 쌍경대와 월연대 주변의 단풍 숲을 걸으며 선비 문화의 진수를 맛보기 좋습니다. 이어 차로 10분 거리인 보물 '영남루'를 찾아보세요. 밀양강 절벽 위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대한민국 3대 명루에 올라 시원한 강바람을 맞고, 차로 15분 거리인 '위양지'의 이팝나무 고목과 저수지에 반영된 늦가을 잔잔한 물빛을 둘러보면 밀양의 자연과 역사를 하루 만에 잇는 완벽한 당일치기 여정이 완성됩니다.
밀양 금시당·백곡재 실전 이용정보

- 위치: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로 24-183 (금시당·백곡재 경내)
- 산책 제원: 강변 산책로 및 경내 왕복 약 500m (보행 약 40분~1시간 소요 / 난이도: 쉬움·평지 흙길)
- 2026 단풍 절정기: 11월 첫째 주 노란빛 개화 시작 ➔ 11월 둘째 주~셋째 주(11월 중순) 황금빛 최고 만개 및 낙엽 융단
- 운영 시간: 매일 10:00 ~ 17:00 (사유지 문중 관리 특성상 일몰 전 퇴장 필수)
- 입장료 / 주차비: 전면 무료
- 주차 안내: 고택 진입로가 매우 좁은 농로 외길이므로 성수기 마주 오는 차와의 교행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초입의 ‘밀양시 국궁장(영석정)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도보 5분 이동하는 것을 강력 추천합니다.
- 문의처: 055-359-5641 (밀양시 문화예술과)
- 에디터's 꿀팁: 금시당은 여양 이씨 문중의 사택이 공존하는 엄숙한 문화유산이므로 지정된 관람로만 정숙하게 통행해야 하며, 툇마루나 난간에 무리하게 올라서는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흙담에 내린 노란 잎사귀와 흐르는 강물 끝자락에서 만나는 가을의 여운

고택 마루 끝에 가만히 걸터앉아, 서늘한 늦가을 강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샛노란 은행잎과 저 멀리 밀양강 푸른 물결 위로 잔잔하게 부서지는 은빛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 엉켜 있던 조급함들이 맑은 가을바람 속으로 고요하게 씻겨 내려갑니다.
세속의 명리를 과감히 던져두고 흙으로 돌아와 참된 자아를 마주했던 옛 선비의 초연한 기개와 반천년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제 몫의 가장 눈부신 황금빛을 피워내는 거목의 너른 품은, 쉼 없이 질주해 온 우리에게 잠시 걸음을 늦추고 삶의 결을 다듬을 수 있는 다정한 쉼표를 건냅니다.
그윽하게 무르익는 11월, 밀양 금시당의 호젓한 흙담 길을 천천히 거닐며 자연과 선비 정신이 건네는 깊은 평온과 단단한 위로를 온전히 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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