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의 푸른 바다를 병풍처럼 두른 충남 태안 백화산 자락에 가을이 깊어지면, 산사 경내 전체가 눈부신 황금빛 바다로 일렁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이자 아담한 산중 사찰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백화산 기슭의 흥주사가 품어낸 가을 정경입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전각 대신, 무려 90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뎌내며 한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사찰 마당을 포근히 감싸 안으며 찾는 이들에게 깊고 고요한 위안을 건넵니다.
노승의 지팡이에서 피어난 기적, 흥주사 창건 설화

흥주사 은행나무에는 산신령의 계시와 지극한 기도가 얽힌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아득한 옛날, 먼 길을 걷던 한 노승이 백화산 기슭에서 쉬던 중 꿈속에 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은 장차 부처님이 상주할 터이니 지팡이로 표시해 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꿈에서 깬 노승이 그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두고 밤낮으로 정진하자, 마른 나무 지팡이에서 파란 은행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감복한 산신령이 다시 나타나 "자식 없는 자가 이 나무에 기도하면 자손을 얻고 부귀를 누려 부처를 모실 것"이라 일렀고, 훗날 그 자손들이 절을 세우며 풍성한 은행 열매처럼 부처의 자비가 만대에 이어지길 바라는 뜻으로 '흥주사(興住寺)'라 이름 붙였습니다.
손상 없이 뻗어 오른 900년의 위용, 충남 자연유산 지정

만세루 앞마당에 뿌리를 내린 이 거목은 단일 줄기로 웅장하게 치솟은 뒤, 상부에서 사방으로 굵은 가지를 시원하게 뻗어내며 하늘을 가립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속이 비거나 껍질이 상하기 쉬운 다른 노거수들과 달리, 흥주사 은행나무는 원줄기(주간부)에 외형적 손상이 전혀 없고 수피가 매끄러우며 생육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건강합니다.
빼어난 수형과 온전한 보존성을 높게 평가받아 지난 2024년 10월 21일 충청남도 자연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봄의 연둣빛 생명력과 여름의 짙은 녹음을 지나, 10월 하순 황금빛으로 물드는 잎사귀는 거대한 자연의 조각품을 방불케 합니다.
백화산 능선과 어우러지는 호젓한 산사 경내 산책

흥주사는 전각이 빽빽하지 않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산사의 고즈넉한 여백을 누리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진입로를 따라 울창한 솔숲을 지나면 단정한 누각인 만세루와 마주합니다. 돌계단을 딛고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서면 뒤로는 백화산의 암릉 능선이 병풍처럼 절을 감싸고, 시선을 돌리면 저 멀리 태안읍 시가지가 아늑하게 내려다보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900년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사귀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고색창연한 대웅전의 붉고 푸른 단청과 황금빛 은행잎이 겹쳐지는 풍경은 카메라 셔터를 절로 누르게 만드는 찰나의 절경입니다.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 백화산 구름다리

사찰 관람을 마친 뒤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자리한 '백화산 구름다리'를 연계해 들러보세요. 백화산 정상부 암벽 사이에 놓인 출렁다리를 건너며 가을바람과 함께 태안 시내와 서해 바다를 막힘없이 굽어볼 수 있습니다.
여정을 마친 뒤에는 태안 읍내 전통시장 식당가로 이동해 서해안 꽃게와 겉절이 김치를 넣고 시원 칼칼하게 끓여낸 향토 별미 '게국지'나 바다 향 가득한 '우럭젓국'을 맛보세요. 깊고 진한 국물 한 숟가락이 서늘한 산바람을 맞고 난 뒤의 속을 훈훈하고 든든하게 덥혀줍니다.
태안 흥주사 이용정보

- 위치: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속말1길 61-61 (흥주사)
- 단풍 절정기: 10월 하순 ~ 11월 초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무르익는 시기)
- 지정 현황: 충청남도 자연유산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 (2024년 10월 21일 지정)
- 운영 시간 / 휴무일: 상시 개방 / 연중무휴
- 입장료 / 주차료: 전면 무료 (사찰 입구 전용 주차장 완비)
- 문의: 041-674-3473
- 방문 팁: 사찰 진입로는 포장되어 있어 일반 승용차로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경내가 아담하여 둘러보는 데 약 40분에서 1시간이면 충분하므로 백화산 산책로와 함께 묶어 동선을 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은행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 편안한 운동화를 착용하시길 권장합니다.
천년의 세월 앞에 잠시 내려놓는 마음의 짐

바람결을 따라 만세루 앞마당에 흩날리는 황금빛 은행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을 짓누르던 세상의 조급함이 어느덧 잦아듭니다.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묵묵히 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올린 이 고목은, 삶의 참된 평온이란 거창한 것을 좇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선 자리에서 계절의 흐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노란 은행잎이 경내를 가득 채우는 깊은 가을, 태안 백화산 흥주사를 찾아 900년 고목 아래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나만을 위한 맑고 따뜻한 쉼표를 찍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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