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의 푸른 생명력이 가득한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는 도심 속 콘크리트 빌딩 숲과 대비되는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역사 문화 공간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동래정씨 시조 정문도 공의 묘소가 자리한 화지공원 ‘정묘사’인데요.
이곳은 예로부터 '화지산 배롱나무', '정묘사 배롱나무' 등으로도 불려왔으나 정확한 공식 명칭은 ‘부산진 배롱나무’입니다. 고려 중엽 안일호장을 지낸 시조의 묘소 앞 양쪽에 심어진 이 배롱나무는 무려 800년이라는 경이로운 수령을 인정받아, 지난 1965년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소중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7월 기준)은 연둣빛 싱그러운 이파리 사이로 갓 맺히기 시작한 수줍은 꽃봉오리들이 가득한 상태이지만, 다가올 8월 초가 되면 묘소 앞을 진분홍빛 무릉도원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800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부산진 배롱나무와 정묘사 일대의 깊이 있는 탐방 포인트를 소개해 드립니다.
왕실 부럽지 않은 가문과 존경의 상징, '하마정(下馬亭)과 하마비'

정묘사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비석이 있습니다. 바로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와 하마 조형물입니다. 이 비석 때문에 주변 지명마저 ‘하마정’이라 불리게 되었는데요. 과거 이 지역을 지나던 수많은 유생과 관리, 세인들은 동래정씨 가문의 정신적 뿌리이자 세인이 숭앙하는 묘지인 '정묘' 앞을 지날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해 타고 가던 말에서 기꺼이 내려 걸어갔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궁궐이나 종묘, 서원 초입에서나 볼 수 있는 하마비가 사조의 선산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터가 지닌 역사적 무게감과 품격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껍질이 갈라져 빚어낸 대자연의 기적, '동·서 배롱나무의 현재'

양정 지하철역에서 하마정을 지나 화지공원 표지석에 다다르면 단정하게 정비된 현경문이 나타납니다. 문을 통과해 잘 다듬어진 울창한 숲길을 호젓하게 산책하듯 걸어 올라가면 2004년에 준공된 동래정씨 사당인 '추원사(追遠祠)'가 나타나고, 그 오른쪽으로 마침내 천연기념물 배롱나무의 위엄찬 자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고려 중엽에 동서 양쪽에 심어진 원래의 줄기 2그루는 기나긴 세월이 흐르며 속이 썩어 고사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강인한 생명력으로 껍데기 부분만 남아 자라다가 여러 그루로 분리되며 지금의 독특한 군락 형태를 이루게 되었는데요.

- 동쪽 배롱나무: 높이 8.3m 규모로, 줄기가 분리되어 현재 6그루가 한곳에 모여 조화롭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 서쪽 배롱나무: 수세가 다소 약해져 과거 굵은 줄기들은 고사했지만, 가슴높이 둘레 40cm 정도의 살아남은 가지가 기적처럼 푸른 잎을 틔워내며 800년 가문의 서사를 굳건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화무십일홍'을 비웃는 백 일의 붉은 열정, '목백일홍'의 가치

배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 부처꽃과의 낙엽교목으로, 흔히 '나무에 피는 백일홍'이라 하여 풀꽃인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해 ‘목백일홍’ 또는 ‘나무백일홍’이라 부릅니다. 보통의 꽃들은 피어난 지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배롱나무는 7월부터 9월까지 무려 100일 가깝게 꽃을 피우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 앞에서는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립니다. 또한 배롱나무 무덤가에 피어난 붉은 꽃송이에는 이무기와의 사투 끝에 하얀 깃발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자결한 규수의 슬픈 사랑 전설이 깃들어 있어, 진분홍 꽃잎을 바라볼 때 애틋하고 애절한 서정성을 더해줍니다.
선비의 청렴함과 수행자의 무소유를 가르치는 '나무의 철학'
과거 조선 시대 명문 종택이나 서원, 사찰의 마당에는 늘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조화롭게 심겨 있었습니다. 옛 선조들은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없는 정원은 품격 있는 정원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이 두 나무를 정원의 필수 요소로 삼았는데요. 여기에는 깊은 철학적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 종택과 서원에 심은 이유: 매끄럽고 하얀 배롱나무 줄기처럼, 티 없이 깨끗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을 닮아 학문과 덕을 닦으라는 선비 정신의 상징이었습니다.
- 사찰에 심은 이유: 배롱나무는 해마다 매끄러운 껍질을 스스로 허물처럼 벗어던집니다. 사찰에서는 출가 수행자들이 이 나무를 바라보며 세속에서 묻어온 묵은 습성과 어지러운 욕망, 집착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라는 무소유의 가르침으로 삼고자 심었습니다.
부산진 배롱나무(화지공원 정묘사) 이용 정보 요약

- 소재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 335 (양정동, 화지공원 내 정묘사)
- 교통편: 부산 지하철 1호선 양정역 하차 후 하마정 방향 도보 이동 편리
- 이용 시간: 상시 개방 (단, 사당 내부 및 문화재 구역 매너 관람 필수)
- 이용 요금: 공원 및 정묘사 입장료 전면 무료
- 주차 요금: 10분당 200원 / 1일 주차 6,000원 (신용카드 정산)
- 종합 문의처: 부산진구청 문화체육과 (051-605-4065)
- 최적의 개화 시기 추천: 7월초 현재는 숲 전체가 푸른 초록빛을 띠며 이제 막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하는 준비 단계입니다. 꽃잎이 흐드러지듯 만개한 풍성하고 화려한 진분홍빛 장관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7월 말에서 8월 초 중순 사이에 방문하시는 것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마무리하며

사람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어 무려 80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동안 한 가문의 역사와 수행의 철학을 묵묵히 품어 안아온 ‘부산진 배롱나무’. 이번 주말에는 시끌벅적한 해운대 바다 대신, 푸른 숲길과 하마비의 옛 서사가 살아 숨 쉬는 정묘사로 다정한 사색 산책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세속의 욕망을 허물처럼 벗어던지는 청렴한 나무 아래 서서 맑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지쳐있던 일상에 정갈하고 은은한 위로가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